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9 선언 (문단 편집) == 상세 ==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VN19872030-00_01043301.jpg]] [[4.13 호헌조치]]가 참아왔던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일어난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노태우 후보는 6월 29일 시국 수습을 위해 이 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가 한국 땅에 정착되었고, 13대 노태우 대통령부터는 국민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이전에도 [[이승만]], [[박정희]]는 직선제로 대통령이 된 적이 있긴 했다. 허나 알다시피 이승만은 박수칠 때 떠나지 못하고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씁쓸한 모습을 남기며 국민들에게 쫓겨났고, 박정희는 합법적 민간정부였던 [[장면 내각]]을 [[5.16 쿠데타]]로 무너뜨린 후(제2공화국은 [[의원내각제]]였다), 관권선거란 이점 속에서도 직선제 대통령은 점점 힘들다는 감이 오자 종국엔 [[10월 유신|간선제로 국민의 주권을 뺏어버린다]]. (전두환 역시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연장선상에서 박정희 역시 [[김재규]]에게 [[10.26 사태|암살당하고 만다]].] 즉, 한국에서 제대로 정착된 제도적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민주주의 정착은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사회의 탈권위주의가 이뤄지는 90년대 중반부터.]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전두환에게 건의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비롯해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뺀 시국사범의 대거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하였다. 당초 노태우는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공식 사과'''도 넣으려 하였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빠졌다.[* 사실 [[노태우]]의 5.18에 대한 입장은 묘한데, 정권을 잡은 후의 행보는 [[3당 합당]]을 위해서인지 5.18 조사에 대한 전권도 약속하며 간이라도 내줄듯 김대중을 회유했으나,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노태우는 5.18을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 군부가 무조건 잘못한 것도 아니다(유언비어가 진범, 5.17은 치안 유지 차원이라고 믿고 있다, (1995년 구속 직전) 문화대혁명처럼 더 많은 피를 흘린 사건조차 처벌된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란 식의 양비론을 펼쳤다. 그런데 몸져앓아 누운 후엔 전두환과 차별화를 하고 싶었는지 진짜 생각이 바뀌었는지 어쨌는지 2019년부터 장남 [[노재헌]]을 통해 사과 의사를 표명했다.[[http://www.thebriefi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798|#]] 물론 비판 측에선 아들이 대신 온거지 본인이 직접 사죄 표명을 한건 아니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다만 노재헌 말에 의하면 2010년대 몸져누운 이후 의사소통도 제대로 안되는 상황이라 육성으로 전하지 못하는게 안타깝다고 하고, 어쨌든 그러다 결국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bmN10yU50U8|과오들에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이후 전두환과 달리 추징금도 완납했기 때문인지 문재인 정부는 국가장을 허가해줬다.[[https://www.sisa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7595|#]]]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를 청와대에 건의해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당 대표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은 선언 다음 날 특별담화에서 6.29 선언 수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youtube(6tHwjr0_jak)] 훗날 관련자들의 주장 등으로 드러난 바에 의하면, 노태우가 독단적으로 결정한 것은 아니고, 전두환이 직선제를 결심한 뒤 노태우로 하여금 이를 건의해 노태우가 수용하고 발표하게 하였다고 한다. 즉, 노태우의 직선제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이미지메이킹을 한 것. 김성익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의 저서 <전두환 육성증언>에서 전두환 본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실은 2주일 전에 노 대표와 저녁을 함께 할 때 내가 직선제를 검토해 보라고 했더니 노 대표가 펄쩍 뛰었다. 그래서 내가 「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했어. 그리고 인간사회의 모든 원리가 백보 전진을 위한 일보후퇴에 있다, 지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 김성익 저. 조선일보사. 1992. p441, 2차 출처: 중앙일보 1993년 2월 19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2787855|<청와대 비서실>]] 내용 중에서. 물론 노태우가 실제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시 보안사의 참모들 역시 정세 분석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직선제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고명승]]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보안사 참모들의 의견을 전두환에게 진언했고, 대통령은 보안사의 의견을 비중 있게 경청했다는 얘기도 있다. 고명승 본인은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그해(1987년) 4월 중순 보안사의 장성 참모 등 핵심부에서는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든 직선제를 택해야 하며, 당선된 1년 후 중간평가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사면 복권한다면 굳이 특정인들을 제외시킬 필요가 없다는 참모들의 판단이었습니다. > - 원 출처: <군부와 권력> - '80년대 신군부와 6공의 민군관계(김재홍 글)'. 나남. 1992. p181 또 김성익이 쓴 책에 의하면 1986년 당시 한 언론인이 작고 전에 전두환을 만날 적에 간선제가 직선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으며, 전두환이 이에 동조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원 출처: <전두환 육성증언> p447~448. 이 책에서 언급된 언론인은 그 당시에 사망한 [[선우휘]]로 보인다.] 물론 전두환이 [[4.13 호헌조치]]를 고수하면서 [[6월 민주항쟁]]이 터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 와서 보면 다 부질없는 소리긴 하지만. 어쨌든 6.29 선언으로 인해 몇달 후 대통령 5년 단임 직선제를 골자로 한 [[9차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붙여져 94.5%의 찬성을 받아 통과되었고, 이후 2020년대 현재까지도 한국은 소위 87년 체제라 일컬어지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